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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신성일 별세...한국영화 100년을 앞두고 큰 별 지다

“영화배우로서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 그런 아빠를 사랑한다”

글  백승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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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월간조선 인터뷰 당시의 고인.
한국영화 100년을 앞두고 큰 별이 졌다. 배우 신성일이 11월 4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향년 81세. 영화처럼 살다가 영화 제목처럼 '별들의 고향'으로 떠났다. 작년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지방 의료기관에서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담담히 '마지막'을 준비해온 그였다.
    
고인은 1937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당시 대구의 명문고였던 경북고교를 졸업하고도 대학을 진학하지 못했다. 고교 졸업 후 상경, 호떡장사로 학원비를 벌며 서울대 입학을 준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우연한 기회에 연기를 해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연기학원을 다니던 중 1957년 당시 최고의 영화제작사였던 '신필림'의 연기자 공모에서 지원, 264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뽑혔다.
        
고인은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후 ‘맨발의 청춘’ 등 수많은 청춘 멜로영화에서 500회가 넘는 '주연'을 맡았다. 한국영화계에서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대한민국 대표 미남 배우로 '한국의 알랭드롱'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고인은 1964년 ‘18일’ 만에 만든 '맨발의 청춘'으로 영화배우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관객 23만명이 이 영화를 봤다. 당시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누구나 이 영화를 보며 사랑을 꿈꿨고, 사랑에 대해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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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에 상영된 엄앵란·신성일 주연의 '맨발의 청춘'(왼쪽). 1963년 팬들의 투표로 제1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인기상을 차지한 엄앵란·신성일.
  
  
그가 출연한 작품은 대부분 히트를 쳤다. '아낌없이 주련다'(1962) '가정교사'(1963) '청춘교실'(1963) '떠날 때는 말없이'(1964) '맨발의 청춘'(1964) '초우'(1966) '별들의 고향'(1974) '달빛 사냥꾼'(1987) '위기의 여자'(1987) '레테의 연가'(1987) '아메리카 아메리카 아메리카'(1988) '증발'(1994) 등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사(史)를 써왔다. 상대역으로 출연한 여배우만 119명에 이른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의 주제가도 인기를 크게 끌었다. '하숙생' '동백아가씨' '별들의 고향' 등이 대표적이다.
  
고인은 1964년 당대 톱스타 엄앵란과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결혼했다. 데뷔작 ‘로맨스 빠빠’를 비롯해 ‘아낌없이 주련다’ ‘청춘교실’ ‘새엄마’ 등에 같이 출연해 호흡을 맞추며 연인으로 발전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외신에 보도될 정도로 ‘세기의 결혼식’이 됐다.
    
고인은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1981년 11대 총선 당시 서울 용산·마포구에 한국국민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5년 뒤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고향 대구에서 출마했다. 고배를 마셨지만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동구에 출마해 마침내 국회 입성을 달성했다.
     
이미 세상에 알려진 얘기이지만, 부인과는 법적 부부관계로만 살아왔다. 어느 때부터인가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 ‘졸혼’ 관계로 살아왔다. 고인은 2011년 출간한 ‘자서전’을 통해 과거 한 아나운서와 연애관계였다는 사실을 고백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고인은 2010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당시 한 지상파의 드라마 ‘나는 별일 없이 산다’에 출연한 직후였다.
                   
“촬영 시스템이 예전과 달라 사흘 정도는 적응하는 데 힘들었습니다. 이정란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 대사도 한마디 한마디가 문학적이고 품격이 있어서 ‘제대로 전달이 안되면 어떻게 하나’ 긴장했죠. (중략) 영화계 후배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인데, 나는 항시 영화계 안에 있지 않고 외곽에 있었어요. 후배들에게 물어보면 ‘신성일은 연예계 후배들을 넘겨다 본 적도 없고, 데이트하자는 소리도 못 들어 봤다’고 할 거예요. 진짜 그랬으니까." 
       
고인은 영화계에서 배우 신영균씨와 비교되곤 했다. 당대 최고 스타였고, 정계에 진출해 국회의원을 지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았지만, 한 사람은 젊은 시절 안 쓰고 저축해 큰 부(富)를 이뤘고, 다른 한 사람은 원 없이 쓰며 살았다. 고인은 신영균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그 형님은 저축과 재테크가 몸에 밴 분이었어요. 워낙 어렵고 힘들게 살아온 기억 때문에 돈을 함부로 쓰지 않았죠. 그 마음 충분히 이해가 돼요. 저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고, 젊은 나이에 성공해 최소한 돈에 얽매이지는 않았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던 그는 영화에 대한 사랑을 남달랐다. 암투병 중임에도 그는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 등장해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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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강수화씨는 “영화배우로서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 그런 아빠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고인은 영화인으로서 받을 만한 상은 거의 다 받았다. 청룡영화상 인기상, 아시아 영화제 남우조연상,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 대종상영화제 영화발전공로상, 제28회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특별공로예술가상, 2008년 제17회 부일영화상 영화발전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배우 엄앵란 씨와 아들 강석현, 딸 강경아·강수화씨가 있다. 강석호 자유한국당 의원은 고인의 조카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고인은 아내와 세 자녀들과 떨어져 살았지만 가족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늘 간직해왔다. 올해 3월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 출연해 그런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떨어져 살았던 가족들도 그런 '남편' '아버지'를 이해했다. 딸 강수화씨는 몇 년 전 필자에게 “영화배우로서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 그런 아빠를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입력 : 2018-11-04 10:52]   백승구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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